민구홍은 중앙대학교에서 문학과 언어학을, 미국 시적 연산 학교(School for Poetic Computation, SFPC)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하지만 ‘좁은 의미의 문학과 언어학’으로 부르기를 좋아합니다.)을 공부했습니다. 안그라픽스와 워크룸에서 편집자, 디자이너, 프로그래머로 일한 한편, 1인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운영하며 미술 및 디자인계 안팎에서 활동합니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는 「새로운 질서」에서 ‘실용적인 동시에 개념적인 글쓰기’의 관점으로 코딩을 이야기하고 가르칩니다.
지은 책으로 『하이퍼링크』, 『새로운 질서』 등이, 옮긴 책으로 『*새로운*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까지.』 등이 있습니다. 2022년부터 안그라픽스 랩 디렉터로 일하며 ‘하이퍼링크’를 만듭니다. 2026년 공개한 텍스트 파일 기반 위키 엔진 위키위키위키(WikiWikiWiki)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편집자, 민구홍
― ‘민구홍’이라는 사람과 운영하시는 민구홍 매뉴팩처링, 「새로운 질서」, 그리고 AG 랩에서의 역할을 소개해 주세요.
무엇보다 저는 스스로를 편집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편집은 책 안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편집은 문장과 문장 사이, 파일과 폴더 사이, 회사와 회사 아닌 것 사이, 무엇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질서를 만드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반듯하지는 않습니다. 책상 위에 흩어진 물건들을 깔끔하게 치우는 대신 자주 쓰는 물건을 손이 닿는 곳에 두는 일과 비슷하죠. 그렇게 제 역할까지 조금씩 편집하다 보니, 어떤 날은 글을 쓰고, 어떤 날은 웹사이트를 만들고, 어떤 날은 수업을 진행하고, 어떤 날은 회의 중에 회의를 조금 더 빨리 끝내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2015년 설립해 지금까지 운영하는 1인 회사입니다. 임직원은 설립자 겸 운영자인 저 한 명이지만, 일은 자꾸 다른 사람, 장소, 조직, 문장 등에 붙어 생깁니다. 회사가 커진다기보다 ‘회사’라는 말이 포스트잇처럼 여기저기 붙습니다. 그런 점에서 바로 떼어낼 수도 있고요.
「새로운 질서」는 2016년 크리스마스 이튿날 워크룸에서 열린 비공식 워크숍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온 교육 및 창작 플랫폼입니다.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하지만, 여기서 교양은 구름 너머에 있는 고상한 지식보다 우리가 거의 매일 마주하지만 정확히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죠. 「새로운 질서」에서는 HTML, CSS, 약간의 자바스크립트를 배우며, 작고 낯설고 무엇보다 다시 고칠 수 있는 자신만의 웹사이트를 직접 만듭니다. 누군가는 이 과정을 ‘코딩’으로 부르지만, 저는 ‘실용적인 동시에 개념적인 글쓰기’로 부릅니다. 둘 사이 흐르는 강은 그리 넓지 않습니다. 「새로운 질서」는 나를 소개하는 자리를 남에게 빌리지 않고, 나를 소개하는 형식을 직접 만드는 시공간이죠. 기술은 그 형식을 직접 만들기 위해 당연히 지나가야 하는 길이고요.
2022년 2월 22일 문을 연 AG 랩에서는 안그라픽스 안팎에서 웹을 비롯한 기술, 편집, 디자인이 만나는 지점을 다룹니다. 실험실을 뜻하는 ‘랩’이라는 말은 여러모로 편리합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모든 실패가 실험은 아닙니다. AG 랩에서는 개발자 겸 연구원 백창인 님과 ‘하이퍼링크’를 만듭니다. 하이퍼링크는 AG 랩에서 수행하는 일과 그 결과물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 하이퍼링크 가운데 하나로 『하이퍼링크』라는 책이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세계는 그 자체로 하이퍼텍스트다. 세계에 자리하거나 자리할 모든 것은 하이퍼링크다.”
중간 지대에서 일하기
―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안그라픽스, 워크룸, AG 랩 등 서로 다른 ‘숙주’를 거치며 운영되어 왔습니다. AG 랩 디렉터로 일하시면서 동시에 1인 ‘기생’ 회사 민구홍 매뉴팩처링을 운영하는, 흔치 않은 형태로 일해 오셨는데요.
처음부터 이런 모델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아남으려다 보니 모양이 조금씩 구부러졌고, 나중에 보니 구부러진 모양이 제법 쓸 만했습니다. 누구든 독립을 상상하면 자기만의 사무실, 자기만의 브랜드, 자기만의 책상과 의자를 떠올리곤 합니다. 이 상상은 근사하지만, 제게는 조금 두려웠습니다. 의자가 하나뿐인 공간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혼자 있고 싶지만 완전히 혼자 있고 싶지 않았고, 독립하고 싶지만 고립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술가의 고독보다 프리랜서의 세금 처리, 건강 보험과 더 가까운 문제입니다.
‘기생’이라는 말을 앞세운 까닭입니다. 하지만 기생이 반드시 고약한 건 아닙니다. 세상에는 숙주를 망가뜨리는 기생도 있지만, 숙주와 함께 살아가며 숙주의 움직임을 조금 다르게 만드는 기생도 있으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생은 숙주에 더부살이하며 서로의 리듬을 조금씩 바꾸는 일에 가깝습니다. 저는 안그라픽스, 워크룸, AG 랩 같은 크고 작은 조직에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고, 동시에 그 안에서 제 방식으로 작은 환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곳으로 글쓰기와 웹을 비롯해 오늘날의 일하기 방식에 관한 크고 작은 질문이 흘러 들어왔고요.
이제껏 거쳐온 숙주는 민구홍 매뉴팩처링에 일정, 예산, 클라이언트, 계약, 조직의 언어, 회의실 예약, 이메일 제목처럼 현실감을 안깁니다. 반대로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숙주에 약간의 비현실감을 안기고요. 이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삼키지 않아야 합니다. 숙주가 너무 힘이 세면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사라지고, 민구홍 매뉴팩처링이 너무 제멋대로 굴면 숙주가 다치죠. 저는 대체로 그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일하는 것 같습니다. 한 발은 바닥에 닿아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이름 붙이기 어려운 곳으로 조금씩 미끄러집니다. 이렇게 중간 지대에서 일하는 건 다소 번거로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만 생기는 일이 있다고 믿습니다.
― AG 랩에서는 클라이언트와 협업하는 프로젝트와 내부적으로 기술을 다루는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계십니다. 두 작업은 어떤 점에서 가장 다르게 움직이나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조건이죠. 끝이 있는 일은 사람을 정직하게 만듭니다. 적어도 마감 직전에는 “이 정도면 됩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죠. 반대로 내부 프로젝트는 끝이 조금 흐릿합니다. 그렇다고 일이 느슨해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 거리가 많아지죠.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서는 마감과 요구 사항이 질문의 범위를 어느 정도 정해주지만, 내부 프로젝트에서는 직접 따져야 합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지, 이름은 무엇으로 붙일 것인지, 무엇을 먼저 보여주고 무엇을 뒤에 둘 것인지, 그리고 언제 그만둘 것인지. 이런 질문이 프로젝트의 움직임을 정합니다.
두 작업은 생각보다 자주 서로에게 묻어납니다.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는 내부 프로젝트에 현실감을 안깁니다. 실제 일정, 실제 예산, 실제 사용자, 실제로 어제까지 작동하던 기능이 오늘 먹통이 되는 상황 같은 것들이죠. 반대로 내부 프로젝트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아직 쓸모가 정해지지 않은 구조, 인터페이스, 작명 방식 등이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도구가 되는 거죠. 이렇듯 클라이언트 프로젝트는 내부 프로젝트를 검증하고, 내부 프로젝트는 클라이언트 프로젝트에 생각할 거리를 남깁니다. 좋은 경우 둘은 서로를 천천히 공진화시킵니다.
최근에는 안그라픽스와 AG, AG 랩의 웹사이트와 관련된 작업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웹사이트를 만들거나 고치는 일이지만, 실제로는 조직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이름, 메뉴, 문장, 하이퍼링크, 폴더 구조, 관리자 화면의 입력칸까지 모두 조직이 자신을 배열하는 방식이 됩니다. 조직은 대개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웹사이트를 만들기 시작하면 곧 자신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 몰라 당황합니다. 좋은 웹사이트는 멋진 화면이라기보다, 그 조직이 스스로를 덜 속이는 방식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 민구홍 매뉴팩처링에서는 「회사 소개」처럼 회사 소개 자체를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다루기도 했습니다. 구홍 님께 ‘자기를 소개하는 일’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창작자가 스스로를 소개할 때 한 번쯤 고민해보면 좋을 질문이 있다면 함께 들려주세요.
자기소개는 중요합니다. 그런데 근사한 자기소개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소개는 자신을 포장하는 일이라기보다 자신의 이름 옆에 무엇을 놓을지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자기소개는 불가능합니다. 사람은 늘 자기소개보다 크거나 작으니까요.
민구홍 매뉴팩처링의 「회사 소개」 또한 그런 장치였습니다. 보통 회사 소개는 무엇을 하는지 드러냅니다. 저는 반대로 무엇을 하지 않는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청개구리 같은 심보죠. 그런데 하지 않는 일을 이야기하면 재미있게도 하는 일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합니다.”라고 말할 때보다 “않습니다.”라고 말할 때 더 정확해지는 순간이 있는 거죠. 사람도 대개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에서 자신을 더 잘 드러내지 않나요?
창작자가 자기소개를 할 때 한 번쯤 고민해 보면 좋은 질문은 ‘나는 무엇을 잘하는가?’보다 ‘나는 무엇과 연결돼 있는가?’입니다. 자기소개는 자신을 완전히 설명하는 일보다 자신이 어떤 사람, 어떤 장소, 어떤 문장, 어떤 일과 이어져 있는지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정확하려 하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너무 매력적이려고 하면 오히려 자신이 사라질 가능성이 크죠. 요컨대 화장은 필요하지만,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화장이 얼굴을 대신하면 곤란하니까요. 뾰루지가 날 수도 있고요.
편집자의 도구: 웹, 글쓰기, 코드
― 그동안 웹을 중요한 작업 매체로 삼아 오셨습니다. 종이가 아닌 웹에서만 가능한 ‘편집’의 묘미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종이는 닫힌 척하는 매체고, 웹은 닫힌 척해도 자꾸 새는 매체입니다. 책에서도 각주와 색인과 인용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지만, 웹에서는 그 연결이 문장의 일부가 아니라 문장 위에 놓인 작은 문이 됩니다. 하이퍼링크를 누르면 다른 문서로 이동하고, 다시 돌아오고, 길을 잃고, 우연히 오래된 페이지를 발견하고, 누군가의 소스 코드를 훔쳐보고, 이미지가 깨지고, 도메인이 만료되고, 캐시가 남습니다. 웹에서 편집은 내용을 배열하는 일뿐 아니라 어디에 문을 내고 어디를 막을지 정하는 일입니다.
웹에서 편집은 순서보다 관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는 대개 앞과 뒤가 중요하지만, 웹에서는 옆과 옆이 중요합니다. 이 문장 옆에 무엇이 있는가, 이 페이지에서 어디로 갈 수 있는가, 이 하이퍼링크는 왜 여기 있는가, 이 파일명은 왜 이런가. 웹에서는 이런 질문에 답하는 게 모두 편집이죠.
웹을 둘러싼 거의 모든 프로젝트가 그렇지만, 최근 공개한 위키위키위키는 완성 없이 계속 편집되는 문서, 문서와 문서 사이의 하이퍼링크,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구조 등으로 이 감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위키에서는 편집자가 문장을 통제하지 않습니다. 문장들이 서로 길을 찾도록 돕죠.
위키위키위키(WikiWikiWiki) 위키
― 2026년, 직접 개발한 위키 엔진 ‘위키위키위키’(WikiWikiWiki)를 공개하셨습니다. 이미 수많은 도구와 플랫폼이 존재하지만 직접 위키 엔진을 만드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미 수많은 도구와 플랫폼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들었습니다. 도구가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내가 어떤 도구를 원하는지 잊게 됩니다. 문득 나보다 도구가 앞서 있는 듯한, 즉 내가 사용하는 게 아니라 사용당하는 느낌이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텍스트 파일, 폴더, 하이퍼링크처럼 작고 단순한 것에 눈을 돌리게 됐고요. 그렇게 만든 위키위키위키(WikiWikiWiki)는 텍스트 파일 기반 위키 엔진입니다. 데이터베이스 없이 작동하고, 모든 문서는 그저 텍스트 파일로 저장됩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투박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 투박함이 중요했습니다. 투박한 기술은 사용자를 덜 배신합니다. 파일은 파일이고, 폴더는 폴더죠. 이를 대단한 소프트웨어 철학처럼 말할 수 있겠지만, 실은 그저 실용적인 태도입니다. 복잡한 시스템이 망가졌을 때 결국 찾게 되는 건 파일과 폴더니까요.
위키가 필요했던 까닭은 AI 때문이기도 합니다. AI가 등장하면서 글을 쓰고, 모으고, 읽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인간이 직접 쓴 글, 하이퍼링크로 연결하는 감각, 출처와 맥락이 남는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고 느꼈습니다. 위키는 기억의 도구인 동시에 태도의 도구입니다.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무엇을 다시 읽어야 하는지 솔직하게 드러내죠. 위키위키위키는 거대 플랫폼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은 아닙니다. 그저 작은 문서들이 계속 살아 있을 수 있는 집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집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파일이 저장된 폴더입니다. 제게 파일과 폴더는 거의 신앙에 가까운 실용이 됐습니다.
참고로, 위키위키위키는 위키위키위키 위키에서 직접 사용해보실 수 있습니다.
― 구홍 님이 웹에서 타이포그래피를 다룰 때 늘 지키시는 원칙, 또는 반대로 절대 하지 않으려는 것이 있다면?
웹 타이포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면에서 글자는 늘 수많은 요소와 함께합니다. 접속 기기, 웹 브라우저, 운영체제, 해상도, 배율, 네트워크, 사용자의 자세와 눈의 피로, 갑자기 등장하는 카카오톡 알림까지요. 이 모든 걸 이기려는 타이포그래피는 대개 피곤해집니다. 좋은 웹 타이포그래피는 자신이 실패할 수 있음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환경에서 완벽해지려 하기보다 대부분의 환경에서 덜 무례해지는 태도죠.
저는 웹에서 글자가 자신이 디자인됐다고 말하는 순간을 경계합니다. 물론 글자는 디자인돼야 합니다. 하지만 글자가 자신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독자가 글을 읽기 전에 글자의 표정을 읽게 되죠. 저는 글자가 조금 무심해 보이지만 정확한 상태를 좋아합니다. 글줄 길이, 줄 간격, 자간, 여백, 대비, 기기에 따른 변화가 적절한 상태입니다. 좋은 글자는 자신의 존재를 조금 늦게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은 까닭 없이 글자를 괴롭히는 일입니다. 너무 작거나 큰 글자, 너무 가늘거나 두꺼운 글자, 너무 좁거나 넓은 줄 높이, 너무 짧거나 긴 글줄, 스크롤할 때마다 움직이는 문장, 읽기도 전에 감탄을 요구하는 제목 같은 거죠. 그런 점에서 글자는 의자와 비슷합니다. 의자는 예쁠 수 있지만, 앉을 수 없으면 의자가 아니라 조각이죠.
혁오와 선셋 롤러코스터의 프로젝트 앨범을 위한 웹사이트 「AAA」
― 민구홍 매뉴팩처링은 ‘구글 폰트의 친구(Friend of Google Fonts)’로서 Google Fonts + 한국어 웹사이트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 ‘친구’라는 관계는 어떻게 시작되었고, 이 협업 경험이 한글 폰트와 웹 타이포그래피를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주기도 했나요?
2018년 문을 연 ‘Google Fonts + 한국어’는 한글 웹폰트를 본격적으로 서비스하기 전에 이를 예고하는 한편, 한글과 한글 웹폰트의 특징을 소개하는 웹사이트였습니다. 지금은 KAIST에서 시각도구연구실을 이끄는 강이룬 선배의 요청으로 합류하게 됐죠. 나중에 웹사이트 푸터에 추가된 ‘구글 폰트의 친구’에 이름을 올리게 됐고, 그 뒤로 마음껏 자랑할 수 있게 됐습니다.
한글은 웹에서 다루기 까다로운 문자입니다. 글리프 수가 많은 까닭에 웹폰트 용량이 커지기 쉽고, 라틴 알파벳 중심으로 만들어진 웹의 기본값과도 자주 어긋납니다. 그래서 한글 웹폰트는 늘 아름다움과 성능 사이에서 협상합니다. 미학의 문제인 동시에 예의의 문제죠. 느리게 로딩되는 글자는 이따금 불친절한 글자가 되니까요. 그런 점에서 폰트는 일종의 인프라입니다. 특히 웹폰트는 배포와 로딩 방식, 라이선스, 언어 지원, 접근성, 검색 가능성, 유지 관리가 한데 얽혀 있습니다. 좋은 폰트는 글자의 모양뿐 아니라 그 글자가 사용자에게 도착하는 방식까지 포함합니다.
Google Fonts + 한국어
― 웹과 편집, 타이포그래피를 오랫동안 가까이 다뤄 오신 만큼 언젠가 직접 폰트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구홍 님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폰트는 어떤 성격과 태도를 가진 폰트인가요? 또 그 폰트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일까요?
보통 폰트는 읽는 사람과 보는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듯합니다. 오래 읽어도 편한가, 화면에서 또렷한가, 인쇄했을 때 안정적인가, 제목으로 썼을 때 인상이 남는가. 모두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런데 글자는 읽히거나 보일 때보다 쓰일 때 더 오래 제 곁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문장은 누군가에게 잠시 읽히기 위해 제 화면에서 몇 시간 동안 지워지고, 다시 입력되고, 줄이 바뀌고, 괄호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파일 이름 옆에 잠깐 앉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젠가 폰트를 만든다면 ‘읽기’나 ‘보기’보다 ‘쓰기’에 최적화한 폰트를 만들고 싶습니다.
제가 바라는 폰트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오래 들여다봐도 피곤하지 않지만 이따금 낯선 모서리를 보여주는 폰트입니다. 커서 옆에 있을 때 잘난 체하지 않고, 오타 옆에 있을 때 엄격해 보이지 않고, 빈 문서에서는 약간 기다릴 줄 알면 좋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이 우리를 재촉하니까요.
이름을 붙인다면 ‘당신’(You)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폰트명은 대개 폰트 디자이너나 폰트 자신을 앞세웁니다. ‘당신’은 폰트 자신보다 폰트를 고른 사람을 가리킵니다. 폰트 목록 사이에 ‘당신’이라는 이름이 들어오면, ‘당신’은 글자체의 이름인 동시에 쓰는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됩니다. ‘당신’은 저를 포함한 사용자, 즉 당신이 문장을 쓰게 만드는 폰트입니다. 문장이 생기기 전, 커서가 깜박이는 자리에서 너무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기다리면서요. 단, 몇 가지 흠이 있다면 ‘당신’은 너무 흔해서 검색 결과에 노출되기 어렵다는 점과 이름으로서는 조금 물기가 많다는 점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쓰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폰트라면 그 정도 곤란함은 감수해볼 만합니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 「새로운 질서」는 ‘현대인을 위한 교양 강좌’를 표방합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만나 오시면서, 구홍 님이 체감하시는 시대의 변화도 분명 있을 것 같습니다. 예전과 달라진 지점, 그리고 반대로 여전히 변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면요?
올해로 ‘새로운 질서’라는 말을 만든 지 꼭 10년이 됐습니다. 「새로운 질서」에서는 HTML, CSS, 약간의 자바스크립트를 배웁니다. 겉으로는 웹사이트를 만드는 수업처럼 보이지만, 웹사이트는 어쩌면 맥거핀일지 모릅니다. 중요한 건 웹사이트를 핑계로 이름, 순서, 규칙, 연결, 여백을 직접 정해보는 과정입니다. 파일을 만들고, 폴더를 나누고, 이름을 붙이고, 하이퍼링크를 만들고, 오류를 고치다 보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정리하는지 조금씩 드러납니다. 이 과정이 자신만의 질서를 구축하는 연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년 동안 가장 많이 바뀐 것은 사람들이 배우기 전에 이미 너무 많이 안다고 느낀다는 점입니다. 예전에는 HTML을 처음 보는 사람이 정말 처음 보는 얼굴로 앉아 있었습니다. 지금은 튜토리얼, 템플릿, 잘 정리된 예제 화면을 한 바퀴 지나온 뒤에 옵니다. 눈은 이미 완성된 화면을 알고 있고, 손은 아직 빈 파일 앞에 있습니다. 배움은 가끔 모르는 데서 시작되지 않고, 안다고 믿는 것을 조금씩 모르게 만드는 데서 시작됩니다.
도구도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죠. 이제 웹사이트뿐 아니라 이미지, 글, 영상까지 훨씬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만들기 쉬워졌다고 정작 내 것을 만들기 쉬워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듯한 결과가 너무 빨리 생성되는 까닭에 조금 이상하더라도 자기 것 같은 것을 기다리는 힘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기술이 장벽이었다면, 지금은 유사성이 장벽입니다. 다들 너무 빨리 괜찮아집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저뿐 아니라 사람들은 여전히 파일명을 정하지 못하고, 폴더를 어디에 만들어야 할지 망설이고, 첫 문장 앞에서 멈춥니다. 여전히 남의 웹사이트를 부러워하고, 자신이 만든 웹사이트를 계속 들여다보며 조금 실망합니다. HTML은 생각보다 빨리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어느 위치에 둘지, 어떤 문장을 첫 화면에 놓을지, 무엇을 연결하고 무엇을 연결하지 않을지 정하는 일은 꽤 오래 걸립니다. 「새로운 질서」는 그 오래 걸리는 쪽을 경험해보는 시공간입니다.
― AI가 등장한 이후 ‘핸드메이드 웹’이라는 감각이나 가치도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구홍 님이 생각하시는 ‘핸드메이드 웹’은 무엇에 가까운가요?
‘핸드메이드 웹’(Handmade Web)은 J.R. 카펜터(J.R. Carpenter)가 2015년에 제안한 개념입니다. 처음 이 말을 접했을 때 제게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손으로 직접 쓴 HTML, CSS, 자바스크립트, 직접 연결한 하이퍼링크의 감각이었습니다. 파일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서버에 업로드하고, 하이퍼링크가 제대로 열리는지 확인하는 일이죠. 별것 아닌 절차처럼 보이지만, 그 절차를 거치면 웹사이트가 조금 덜 추상적인 것이 됩니다. 폴더 안에 파일이 있고, 그 파일 안에 문장이 있고, 그 문장 안에 하이퍼링크가 있다는 사실이 손에 남습니다.
AI가 발전하면서 핸드메이드 웹을 직접 코드를 썼는지 여부로 판단하기 어려워졌습니다. AI가 코드를 써줄 수도 있고, 사람이 그 코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배포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AI가 쓴 코드를 사람이 읽고, 지우고, 고치고, 자기 조건에 맞게 다시 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건 손이 몇 줄을 입력했는지보다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저는 그 알아차림이 핸드메이드 웹의 핵심에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핸드메이드 웹은 느리고 소박하고 귀여운 웹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스스로 해야 한다는 금욕적인 웹도 아니죠. 오히려 자신의 선택을 남에게 완전히 맡기지 않는 태도입니다. 자동화된 결과물이라도 선택의 경로를 이해하고 책임질 수 있다면, 어느 정도 핸드메이드의 감각을 지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손으로 한 줄 한 줄 썼더라도 아무 생각 없이 베꼈다면 핸드메이드로 부르기 어려울 테고요.
AI 시대의 핸드메이드 웹은 인간이 무엇을 직접 선택할 것인지에 관한 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은 키보드 위에만 있지 않습니다. AI가 생성한 코드를 그대로 붙여 넣지 않고 잠시 멈추는 곳, 필요 없는 기능을 지우는 곳, 더 그럴듯한 선택지 대신 조금 투박하지만 자기에게 맞는 구조를 고르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핸드메이드 웹은 손으로 만든 웹이라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끝까지 돌보는 웹에 가깝습니다.
자주 하는 질문 – 민구홍 매뉴팩처링
― 구홍 님은 수많은 작업과 생각을 꾸준히 인터넷에 공개해 오셨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계속 드러내는 일이 두렵지는 않으셨나요? 또 많은 레퍼런스와 흐름 속에서도 ‘나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있다면?
두렵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이 답변을 쓰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만 공개하는 일이 두려운 만큼 공개하지 않는 일 또한 얼마간 두렵기도 합니다. 제게 작업과 생각을 공개하는 일은 완성된 결과를 발표하는 일이라기보다 내일의 내게 편지를 보내는 일과 비슷합니다. 오늘의 나는 대개 어제의 내게 불만이 많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어제의 나 덕에 오늘의 내가 있죠. 공개된 작업은 조금씩 제 안의 부끄러움을 건드리지만, 그 부끄러움을 견뎌냈음을 증명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나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레퍼런스를 멀리하는 것보다 레퍼런스가 내 안에서 어떤 경로를 거치는지 살펴보는 일입니다. 누구나 영향을 받습니다.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대개 자신이 영향받은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죠. 중요한 건 무엇에 영향을 받았는지보다 영향받은 것이 내 안에서 어디로 연결되고, 어디서 끊기고, 어디서 다시 열리는지입니다. 저는 나다움이 아무것도 없는 순수한 상태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복되는 선택, 실패, 농담, 망설임 같은 것에서 나오죠. 나다움은 발견되는 게 아니라 지워도 남는 자국입니다. 여러 레퍼런스를 거친 뒤에도 끝내 남고야 마는 작은 무언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