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바벨폰트(Babelfont), 그 시작
Q. 한국의 산돌구름 사용자들에게 바벨폰트를 소개해 주시겠어요? 파리와 마라케시, 두 도시를 오가는 배경이 스튜디오에 어떤 색깔을 입혔는지도 궁금합니다.
바벨폰트는 저와 지아 트란(Gia Tran)이 2015년에 함께 문을 연 멀티스크립트 타입 파운드리이자 디자인 스튜디오입니다. 라틴 알파벳부터 아랍어, 한글, 티피나그, 그리스어, 키릴 문자까지 다양한 문자를 다루고 있고, 네슬레나 푸조, 로레알 같은 글로벌 브랜드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파리와 마라케시, 이 두 곳에서 지낸다는 건 우리에게 아주 특별하고 풍요로운 놀이터가 생긴 셈입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덕분에 글자를 보는 시선이 다채로워졌고, 전혀 달라 보이는 문자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닮은 점들을 찾아내곤 합니다. 여러 문자를 동시에 작업하다 보면, 마치 세상을 보는 렌즈를 여러 개 갈아 끼우는 것처럼 창작의 폭이 넓어지는 걸 느낍니다.
Q. ‘바벨폰트’라는 이름에서 바벨탑이 떠오릅니다. 어떤 의미를 담아 지으셨나요?
바벨탑 신화는 우리에게 아주 강렬한 영감을 줍니다. 사람들은 언어가 갈라졌다고 하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세상의 형태와 관점이 풍성해졌다고 생각하거든요. ‘바벨폰트’라는 이름은 그렇게 다양한 언어와 그래픽을 찬미하고 싶어서 지었습니다.
재밌는 건 아랍어로 ‘밥(bab)’이 ‘문’을 뜻한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이 이름에는 두 가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수많은 문자가 가진 매력에 푹 빠져 있다는 마음, 그리고 전 세계 문자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고 싶다는 포부죠. 서로 다른 문자 시스템이 만나 대화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하려는 일입니다.
Q. “폰트가 여러 목소리로 노래한다”는 표현이 참 멋집니다. 형태나 문화, 혹은 감정 중 어디에 더 마음을 쓴 철학인가요?
셋 다 어우러져야 한다고 봅니다. 글자 형태는 언어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어요. 글자 하나하나에는 그 문자를 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리듬, 제스처, 타이밍 같은 문화적 단서가 깊이 배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좋은 서체를 만들려면 미학적으로 비율과 대비를 고민해야 하고(형태), 사람들이 글을 어떻게 읽는지 관습을 존중해야 하며(문화), 어떤 분위기와 온기를 전할지(감정)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형태적으로 아름답고, 문화적으로 사려 깊으며, 감정적으로도 말을 거는 서체를 만들고 싶습니다.
Q. 북아프리카 최초의 디지털 파운드리 중 하나시죠. 마라케시의 디자인 현장은 어떤가요? 파리와는 어떻게 다르고, 어떤 새로운 자극을 주는지 궁금합니다.
파리와 마라케시는 서로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채워줍니다. 파리가 오랜 역사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일이 모이는 국제적인 허브라면, 마라케시는 아랍 서예의 전통과 아마지그(티피나그 문자)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이죠. 마라케시에서 일하다 보면 현지 장인들의 손길이나 독특한 글자 쓰임새를 바로 곁에서 접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들이 우리 디자인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시야를 트이게 해줍니다.
Part 2. 밖에서 바라보며 그린 한글
Q. 어떻게 한글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한국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한글을 디자인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한글의 구조와 흐름을 어떻게 익히셨는지요.
저는 엄격한 논리가 있으면서도 시각적으로 강렬한 문자에 늘 끌렸습니다. 그런데 한글이 딱 그랬어요. 아주 과학적인 원리로 만들어졌으면서도, 그래픽적으로 엄청난 시적인 표현력을 품고 있었죠. 이렇게 독특한 문자를 보고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원어민이 아니기에 더 겸손하게, 더 꼼꼼히 관찰하며 접근했습니다. 언어를 제 식대로 해석하기보다, 한글이 가진 근본 원리를 이해하고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한글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공부하고,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쓰고 있는지 살피고, 기존 폰트들을 뜯어보며 직접 손으로 그려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한글의 리듬과 비례, 흐름이 몸에 익더군요. (지아 트란)
Q. 손글씨 스타일인 ‘마노야’는 한글의 리듬감이 참 좋습니다. 작업하면서 한글 형태 때문에 놀라거나 어려웠던 적은 없나요?
마노야는 손글씨체라서 사람들이 글씨를 쓸 때의 ‘움직임’을 파고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쓸 때 글자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어디서 힘을 주고 빼는지, 빨리 쓸 때는 모양이 어떻게 단순해지는지를 유심히 봤죠. 한글은 원래 구조가 아주 논리정연한데, 손글씨는 즉흥적이잖아요? 이 둘이 부딪힐 때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 덕분에 오히려 더 재미있는 그래픽적 해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Q. 반대로 ‘마브록’의 한글은 건축물처럼 단단해 보입니다. 네모틀 구조인 한글을 다룰 때 다른 문자들과 비슷하게 접근했나요, 아니면 다르게 생각해야 했나요?
마브록을 만들 땐 한글을 ‘작은 건축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음절 블록들이 공간을 어떻게 나눠 갖는지에 집중했죠. 이렇게 접근하니 서체가 훨씬 건축적인 느낌을 풍기게 되었습니다. 다만, 웅장하고 기념비적인 인상을 주면서도 글자가 뭉개지지 않고 또렷하게 읽혀야 한다는 점이 꽤 까다로운 숙제였습니다.
Q. ‘사메오’는 가로획이 세로획보다 굵은 ‘역상 대비’가 특징이라 아주 파격적입니다. 한글 디자인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셨나요?
사메오는 “획의 굵기를 반대로 뒤집으면 어떨까?” 하는 실험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한글이 이런 실험을 하기에 정말 흥미로운 문자더라고요. 글자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할 때, 저는 초성·중성·종성이 블록 안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지 다시 뜯어봤습니다. 물론 전통적인 서체부터 실험적인 서체까지 두루 살펴보면서, 가독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어디까지 과감해질 수 있을지 그 한계선을 탐구했습니다.
Q. 한글을 만들 때 한국인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시나요?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그럼요, 디자인하는 내내 한국인 자문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로 글자가 잘 읽히는지, 문화적으로 어색하지 않은지, 실제로 이렇게 써도 되는지를 확인받죠. 제가 그래픽적으로 의도한 바가 실제 한국어 사용 환경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분들의 시선이 없었다면 완성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Q. 한글 자소 중에서 특별히 아끼는 글자가 있나요?
저는 ‘ㅇ(이응)’을 정말 좋아합니다. 아주 독특하고, 한글이라는 문자의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자 같아요. 만약 ‘ㅇ’이 없었다면 한글이 지금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Part 3. 산돌구름에 합류하며
Q. 산돌구름 런칭을 위해 폰트를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고르셨나요? 한국 트렌드나 사용자들을 고려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멀티스크립트’라는 정체성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폰트들을 모았습니다. 디자인도 다양하고, 쓰임새도 넓어서 실제 작업에 바로 쓸 수 있는 것들로요. 특히 브랜딩이나 편집, UI 디자인을 할 때 한글, 아랍어, 라틴어를 섞어 써야 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유용한 도구가 되길 바랐습니다. 시각적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활용도가 높은 패밀리들을 우선으로 챙겨 넣었죠.
Q. 다른 문자가 섞이면 폰트 디자인의 DNA가 어떻게 달라지나요?
문자마다 지켜야 할 규칙과 생김새가 다 다릅니다. 글자 폭도 다르고, 획이 흐르는 리듬이나 끝맺음, 공간을 쓰는 법도 제각각이죠. 여러 문자를 함께 디자인하다 보면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일관성’을 치열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재밌는 건, 새로운 문자를 더하다 보면 거기서 얻은 아이디어가 전체 패밀리를 더 멋지게 만들어준다는 거예요. 독특한 획 처리나 리듬감이 더해지면서 서체의 개성이 훨씬 뚜렷해지죠.
Q. 이번 컬렉션 중에서 특별히 사연 깊은 폰트가 있다면 하나만 꼽아주세요.
폰트마다 다 사연이 있죠. 손글씨체인 마노야는 자연스러운 리듬을 살리면서도 읽기 편하게 만드느라 애를 먹었고, 건축적인 마브록은 구조를 탄탄하게 잡으면서도 답답해 보이지 않게 하느라 음절 하나하나를 다시 다듬어야 했습니다. 반면 사메오는 걱정했던 것보다 결과물이 훨씬 잘 나왔어요. 역상 대비라 파격적인데도 의외로 술술 읽히고 표정까지 풍부해서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Q. 아랍어, 라틴어, 한글을 섞어서 쓴 프로젝트가 있나요?
네, 네슬레나 로레알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브랜드 이미지가 통일되어야 하니까 라틴어, 아랍어, 그리스어, 키릴어, 때로는 히브리어까지 포함된 폰트 세트를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아직 한글과 아랍어를 메인으로 섞어 쓴 프로젝트는 보지 못했는데, 한국 디자이너분들이 이런 과감한 조합으로 멋진 작업을 해주시면 정말 기쁠 것 같습니다.
Part 4. 걸어온 길, 나아갈 길
Q. 2015년부터 지금까지, 바벨폰트를 성장시킨 결정적인 순간들은 언제였나요?
모든 협업, 동료 디자이너들과의 만남, 클라이언트가 던져준 과제 하나하나가 우리를 자라게 했습니다. 2015년에 스튜디오를 정식으로 열고, 처음으로 다국어 프로젝트를 맡았던 순간, 그리고 파리와 마라케시를 오가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일하게 된 것이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덕분에 생각이 깊어지고 만나는 사람도 많아졌으며, 국경을 넘나드는 타이포그래피가 정말 필요하다는 확신도 얻었으니까요.
Q. “문화를 잇는다”는 바벨폰트의 미션, 요즘 세상에서 더 어려워졌나요, 아니면 더 중요해졌나요?
확실히 더 중요해졌습니다. 세상은 다 연결되어 있다지만 갈등도 심해지고 있잖아요. 이럴 때일수록 눈에 보이는 글자로 다리를 놓는 일이 의미 있다고 봅니다. 다국어 타이포그래피는 서로 다른 문화가 소통하고 어우러지게 도우니까요. 플랫폼도 늘어나고 기대치도 높아져서 일하기는 더 까다로워졌지만, 이 일의 가치는 그 어느 때보다 빛난다고 생각합니다.
Part 5. 바벨폰트가 본 한국
Q. 한국의 서체 디자인 씬을 어떻게 보시나요? 유럽이나 아랍권과는 다른가요?
한국 디자인 씬은 에너지가 넘칩니다. 특히 한글이라는 문자 자체가 블록을 쌓듯 만들어지는 ‘건축적 논리’를 갖고 있어서 아주 독특해요. 선으로 쭉 이어지는 유럽 디자인이나, 물 흐르듯 유연한 아랍권 디자인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죠. 그러면서도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실험적인 시도를 즐기며 세계적인 흐름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Q. 한국 디자이너들이 바벨폰트를 어떻게 써주길 바라시나요? 꿈꾸는 장면이 있다면요.
브랜딩, 패키지, 책, 간판, 전시, 패션 등 어디서든 자유롭게 쓰였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한글과 아랍어를 함께 써서 브랜드 캠페인을 만든다거나 하는, 여러 문자가 어우러지는 프로젝트를 본다면 정말 짜릿할 것 같아요. 서로 다른 문자가 교차하는 그 지점이야말로 우리가 폰트를 만드는 이유니까요.
Q. 혹시 준비 중인 새 프로젝트가 있나요? 한글 폰트가 더 나올까요?
물론입니다! 아랍어, 중국어 패밀리와 짝을 이룰 한글 프로젝트를 몇 가지 진행하고 있어요. 요즘은 ‘필기체의 맛(cursivity)’을 어떻게 살릴지 연구 중입니다. 흐르는 듯한 손글씨의 느낌을 딱딱한 구조의 문자에 어떻게 녹여내야 어색하지 않고 표정이 풍부할지 고민하고 있죠.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감성, 그걸 폰트에 담아내는 게 우리의 영원한 숙제이자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