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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용자의 요구로부터

 

2024년 2월 산돌은 편집, 광고·영상, 그래픽 분야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순전히 폰트 개발자의 창작욕이나 호기심만으로 폰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업 전문가들이 원하는 폰트, 시장이 요구하는 폰트를 개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사용자들이 본문용 폰트를 열렬히 원한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본문용 한글 폰트의 절대적 수가 적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사용자들이 원하는 본문용 부리 폰트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A. 클래식하고 진지한 인상의 폰트

B. 이전 시대의 활자를 재해석한 폰트

C. 친숙하지만 차별화 지점도 있는 폰트

D. 제목과 본문에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폰트

 

A, B의 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원도활자시대(1950-1980년 후반)의 글자 중 하나를 선택하여 복각하기로 했습니다.

‘요건 C’를 고려한다면, 현대 본문용 폰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최정호의 글자가 적합했습니다. 최정호의 활자체, 특히 ‘삼화인쇄체’의 경우, 동아출판사체와 더불어 최정호 한글꼴 계보의 근간을 이루는 활자체입니다. 시중에서 제목과 본문을 가리지 않고 애용되는 여러 폰트의 모태이기에 해당 폰트를 복각한다면 사용자들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삼화인쇄체’를 그대로 복원하는 것만으로는 ‘요건 D’를 충족시키기 어려웠습니다. 즉, 현대적 재해석이 필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요컨대 최정호의 ‘삼화인쇄체’를 뼈대로 삼아 클래식하고 진지한 인상(A), 그리고 친숙함(C)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원전을 재해석하여(B) 제목과 본문에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D) 한다.

 

이것이 바로 「SD 잔」의 제작 배경입니다.

 

 

2) ‘삼화인쇄체’에 대하여

긴 삐침과 부리.
서예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조.
획끼리 거의 맞닿을 듯 긴장감 넘치는 결구. 
그러나 차갑기보단 오히려 우아하게 다가오는 인상.
그 덕에 부드럽고, 선명히 읽히는 글자.

 

심층 인터뷰에서 현업 디자이너들이 요청한 ‘클래식하고 진지한 인상’과 ‘이전 시대의 재해석’에 이보다 잘 어울리는 활자체가 있을까요?

‘삼화인쇄체’는 최정호가 1958년 삼화인쇄소의 의뢰를 받아 만든 부리 계열 활자체입니다.

세로쓰기와 가로쓰기를 혼용하던 과도기의 흔적이 ‘삼화인쇄체’에는 남아있습니다. 특히 서예의 필법에서 보였던 손글씨적인 특징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긴 삐침과 짧은 내릿점이 비대칭을 이루는 ‘ㅅ’, ‘ㅈ’, ‘ㅊ’ 형태, 두툼한 ‘ㅇ’의 상투, 길게 우측으로 삐져나온 받침 ‘ㄴ’, ‘ㄹ’의 형태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삼화인쇄체’는  동시대에 제작되었던 다른 글자들에 비해 독특한 구조와 비례감, 우아한 인상을 가집니다.

또한, 최정호가 동시대에 제작한 ‘동아출판사체’에 비하면 ‘삼화인쇄체’는 보다 안정된 공간을 가집니다.

예컨대, ‘삼화인쇄체’는 동아출판사체와 비교해 ‘원’과 같은 복잡한 글자의 곁줄기와 이음보 사이 공간 분배가 균일하며
‘입’에서는 종성 닿자의 세로 높이를 키워 낱글자 내 분할된 공간의 크기가 유사해 보입니다.

「SD 잔」은 이러한 구조적 특징을 일부 유지하여 ‘삼화인쇄체’ 고유의 인상을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SD 잔」에서 원전으로 삼은 인쇄물은 삼화출판사에서 1971년 출간한 박의상 시인의 《현대시인선집》이며, ‘삼화인쇄체’로 인쇄된 총 528자를 수집하였습니다. 빈출자를 중심으로 집자했고, 필요하다면 글자당 2자 이상 집자하여 둘 사이의 차이를 비교하였습니다.

집자를 진행하며 민글자에서 닿자와 홀자 조형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민글자에서 자소의 형태가 가장 크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속공간이 큰 닿자인 ‘ㄱ’의 민글자 ‘그’와 ‘기’ 같은 글자는 더 많이 수집하여 획 조형에 참고가 될 돌기와 맺음의 형태를 추출하였습니다.

 

 

3)「SD 잔」에 대하여

《현대시인선집》속 활자의 조형 요소는 단아하고 수수해 보입니다. 현대 디자인 작업물에서 제목용 폰트로 활용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지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삼화인쇄체’의 원도를 살펴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삼화인쇄체’의 인쇄본과 원도의 형태는 상이합니다. 이것은 당시 인쇄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으로 원도는 실제 종이에 찍히는 것을 가정하여 그보다 얇게, 잉크가 뭉치기 쉬운 모서리와 획 끝은 더욱 얇게 그려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기술적 한계는 활자체에 원도 설계자의 의도와 미감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설명을 위해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의 일부를 인용하겠습니다.

벤톤자모조각기 두 대를 도입했다. 이제 최정호는 일터에서 활자를 직접 주조하게 된 것이다. 그는 새로 들여놓은 자모조각기를 보는 순간 다시 힘이 솟았다. 그는 특유의 기계 다루는 솜씨를 발휘해 매일 기계의 작동 방식, 특성 등을 살피면서 새로운 글꼴 원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해 10월부터 9포인트 한글 활자 시제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한 만큼 좋지 않았다. 손으로 만드는 활자는 실제 크기로 조각을 하면 되지만 원도는 가로세로 각각 50밀리미터의 칸에 글자가 축소되었을 때를 상상해서 그려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활자를 만들어보니 모난 곳이 많아서 매우 실망스러웠다. 시간이 오래 걸리다보니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시간차로 생기는 체계적 오차, 불균형 등 자신의 미숙한 솜씨에 환멸을 느꼈다. 결국 처음 만든 활자는 모두 용광로에 부어 녹여버렸다. 주위에서는 쓸데없는 일에 돈을 쓰고 있다고 손가락질을 해댔고 최정호도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상문은 포기하지 않고 최정호를 격려했다. 최정호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처음부터 다시 원도를 그렸다. 그렇게 오랜 시행착오 끝에 최정호의 첫 번째 원도로 만든 동아출판사체 약 2,200자가 완성되어 동아출판사는 1957년부터 새로운 활자를 쓰게 되었다.
(안상수, 노은유,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 34-35쪽, 2014)